5주 2번째 시간입니다. 저번 시간에 이어서 춘추전국시대전술 마지막 병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병가는 아시다시피 손자가 기초를 세운 학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대로 그 당시에 많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이 손자라는 사람은 그 싸움에 대해서만 연구를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만들어낸 아주 유명한 것이 바로 진이라는 것이죠, 진. 진이라는 것이 뭐냐면 서로가 서는 대열입니다, 대열. 그럼 단순히 이 서는 진이 도대체 뭔가? 내 병사를 들을 세우는 방법 안에 내가 어떻게 싸워야 되겠다는 철학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군들은 상대방의 진만 보면 지금 저 장수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어떤 전법을 가지고 있는 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병력, 내가 가지고 있는 장비로 저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 그런다면 도망을 가는 것이 상책이겠죠. 네, 그게 바로 삼십육계입니다. 그래서 여러 개의 전법 중에 각 지형, 어떤 기후 변화 혹은 내가 가진 병사의 수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진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또 쉬운 예를 든다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권투라는 경기를 한 번 볼까요? 권투라는 경기를 본다면 모두가 오른손잡이가 싸울 때는 일정한 룰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스트레이트를 치고 훅을 치고 일정한 룰이 있습니다.그런데 어느 날 만난 상대가 오른손잡이가 아니라 왼손잡이였다고 한다면 왼손잡이를 한 번도 상대해 보지 않은 경우에는 대단히 큰 어려움을 겪겠죠. 왜? 상대방의 나오는 펀치가 내가 예상하는 거하고는 전혀 다른, 전혀 다른 형태일 테니까. 그래서 어떤 지금은, 지금은 진이라는 것이 아주 다양하게 경기에 이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한 20년 전에 미국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우연히 며칠 동안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한 일주일동안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전에,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로비에 기숙사 로비에 커다란 텔레비전을 보는 공간이 있었어요. 그래서 보면 저는 개인적으로는 예를 들어서 드라마나 뉴스 같은 것을 보므로 인해서 그들을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항상 그곳에 와서 죽치고 앉아있는 미국아이들이 주로 보는 것은 오직 미식축구하나입니다. 미국의 대학생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어요. 미식축구, 농구나 뭐 이런 것도 관심이 있지만 농구나 야구도 관심이 있지만 제일 관심이 있는 것은 바로 미식축구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식축구를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냥 그것을 아이들이 죽치고 있으면 저는 그냥 빠져나오고 뭐 어떻게 대화도 짧고. 그런데 병원에 들어가 있는 일주일동안에 그 미식축구에 완전히 빠져있을 수가 있었어요. 그 로비에 앉아서는 누구한테 저것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물어볼 수가 없어요. 서로 워낙 그 경기에 빠져있고 그런데 병원에 있으니까 그 옆에 앉은 저랑 같이 병실에 누워있는 그 흑인 친구가 아주 친절하게 여러 가지를 저한테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간단한 몇 가지 룰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뭐 세 번 공격에 10야드를 나가야되고 그 10야드를 나가지 못하면 공격권이 바뀌고 뭐 어떻게 한다는 가장 기본적이었는데 그 당시에 그것을 일주일동안 빠져있는 동안에 아, 거기에서 사용되는 그 많은 공격법, 수비법이 바로 이 손자의 진에 그것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어요. 어, 시간도 많이 떨어져있고 공간도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죠. 그렇지만 벌써 이천 여 년 전에 손자는 이 진이라는 개념으로써 전쟁에서, 전쟁에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내놓은 거예요. 설사 내가 불리하고, 내가 가진 어떠한 병사나 이런 무기가 불리하더라도절대 그것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판결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형을 이용하고, 기후를 이용하고, 여러 가지 전법을 통해서 이길 수 있는 것. 그것을 마련해 놓은 것이 바로 손자의 병가입니다. 더 유명한 이야기는 손자가 죽기 전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 있어서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하지요. 스승이시여, 어떤 전법이, 어떤 장수가, 어떤 전법으로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장수입니까? 라고 물어봤어요. 그럴 때 손자가 대답한 방법은 이것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이 최선이다. 내가 전쟁을 해서 이겼는데 상대방이 수백 명의 병사를 잃었어요. 나도 수십 명의 병사를 잃었어요. 그렇지만 이겼어요. 그렇게 해서 내가 훌륭한 장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병사를 잃지 않고 이기는 전쟁. 그 전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이 그게 훌륭한 장수이다. 그러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정치이지요. 어떠한 첨예한 갈등이 부딪혔을 때 양쪽의 정치지도자가 만나서 그 갈등을 해소함으로 인해서 서로 간의 살상자가 생기지 않고 그 분쟁을 마무리할 수 있는 전쟁. 바로 정치밖에 없습니다.그래서 이 병가는 훗날 유가가 다스리는 통치이념에 그대로 묻어 들어가서 유가의 통치이념을 보호하는 한 수단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자, 이렇게 여러 학설들을 알아봤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무슨 음양가도 있고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만 종행가도 있고 비교적 대표적인 학설은 이 몇 가지입니다. 그 중에서도 그 당시를 전후해서 가장 많은 호응을 얻었던 학설로 바로 공자의 유학과 묵자의 묵가가 있습니다. 공자의 유학이 많은 사람들한테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통치지도자들한테는. 왜 그러냐면 이것은 지나치게 유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급한 마음을 가진 지도자들한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았어요. 묵자의 묵가도 피지배층한테 아주 광범위한 호응을 받았던 학설입니다. 그러나 이 두 학설은 아주 여러 가지 면에서 대략 이런 서로 대단히 상이한 점을 가지죠. 공자는 전통제도에 우호자입니다. 공자는 옛날에 주나라 때 주공이 다스리던 그 시대가 대단히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로 돌아가자고 주공이 가졌던 그런 열린 마음을가지자고 돌아다니면서 여러 지도자들한테 얘기를 했어요. 그 지도자들이 들으면 다 좋은 소리입니다. 공자의 말이 당신의 말이 맞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을 행하는데 그 오랜 시간동안 기다릴 수가 있겠는가. 지금 옆에 나라가 계속 세력을 확장하고 아주 무서운 힘으로 나를 압박하는데 내가 그런 유한 제도를 가지고 오래 버틸 수가 있겠는가. 당신의 말은 이상이다. 현실하고는 맞지 않는다. 거기에 대해서 묵자는 그 공자의 방식에 대해서 비판의 칼날을 세웠습니다. 당신의 학설은 통치자들을 위한 것이다. 백성들하고는 맞지 않는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겸애와 교리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회다. 그래서 묵자가 강조했던 시대는 새로운 사회였습니다. 자, 그래서 이상적이라 할 수밖에 없고 하나는 합리적이지만 통치자입장에서는 또 그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죠. 공자는 문화생활의 극치입니다.음악이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어요. 생선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생선도 가시가 있으면 절대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공자가 여러 번 결혼을 했는데 여러 번 결혼한 이유는 공자의 부인께서 계속 도망을 간 거예요. 그 공자를 모시려니 너무 이게 지켜야 될 것이 많고 복잡한 거예요. 묵자의 신봉자들은 굉장히 열악하고 거친 생활을 했습니다. 겸손하고 절약하고 자신들은 아주 허허벌판에서 아무 덮는 것 없이 그 곳에서 살면서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다른 협력자들을 구했죠. 공자는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전쟁자체를 반대했어요. 왜 전쟁을 하느냐? 인의 정치를 펼쳐야지, 덕을 베풀어야지. 묵자는 전쟁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참여하는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면 막아야죠. 내가 먼저 공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 안에서 어떤 치밀한 계획을 짜고 무기를 만들고 그렇게 해서 그 큰 전쟁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역사는 공자의 학설을 선택하고 묵자를 역사의 무대에서 끌어내리는 상황의 변화를 맞게 되죠.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 돌아보면 예를 들어서 뭐 정치뿐 만아니라 국가의 어떤 정책에 한 면에 사회복지라든가 이런데서 묵자가 담긴 신선한 정책들은 아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런 학술의 끝에 결국 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는 사람은 서쪽의 아주 황량한 땅에 있었던 진나라. 진나라가 결국 이 중원을 통일해서 새로운 나라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의 통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BC.221년에 나머지 여섯 개 나라를 멸하고천하를 통일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대일통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커다란 그 분열을 하나로 이렇게 모아 놨다. 그래서 그것을 대일통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를 통일한 사람은 13살에 진나라 왕인 정이죠. 그래서 자기를 시황제라고 인제 이름을 지었습니다. 자기로부터 시작을 한다는 것이죠. 그 이전에는 왕이라는 이름이 있었죠. 가장 높은 이름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거 가지고는 안 돼요. 그래서 이거에 황이라는 것을 넣고 예전에 있었던 삼왕오제에서 제자를 붙여서 황제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자, 이제 나로부터 시작이다. 그래서 내가 시황제고 내 아들은 1세황제, 2세황제 3세, 4세 해서 이 제국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자기 할아버지 때부터 나라를 다스렸던 법가를 법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법가가 숭상하는 색깔은 검은색입니다. 검은색. 그래서 법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은 검은색을 대단히 좋아하죠. 예를 들어서 법관의 옷도 검은 색이죠. 관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도 검은색입니다. 그래서 관료들의 양복을 보면 요즘은 많이 좋아졌습니다만 검은색 아니면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런 감색이라는 거. 뭐 대통령이하 한때 뭐 그렇지 않다는 조금 변화를 시행을 기해 보려다가 역시 또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전부 관용차는 검은색입니다. 권위를 상징하지요, 권위. 권위가 있어야 나라를 다스린다. 그래서 이 시황제는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이런 거대한 피라미드 조직을 세웁니다. 자신이 맨 정점에 있고 그 밑에 관료들이 있고 그 관료들로부터 점차 맨 마지막에 광범위한 백성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자신의 그 명령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말단에 있는 관리한테 전달되는 그런 방식을 취합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피라미드 조직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조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시황제는 생전에 이 사람이 50살 되는 해에 죽었는데 생전에 여러 차례 전국을 순시하면서 자신의 위용을 보였어요. 여섯 나라 작은 다른 나라들이 계속 맞지 않는 지금 이 진이라는 새로운 통치형태에 들어가다 보니까 여러 작은 지역에서 반란과 끊임없는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시황제는 부지런히, 부지런히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 하나가 바로 이 봉선이라는 겁니다. 봉선이라는 것은 천하의, 천하의 내가 하늘의 위임을 받아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을 고하는 거예요. 그러한 의식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 진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산동의 태산에 올랐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한테 태산은 멀고 높고 신령한 산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황제는 아주 많은 신하들을 이끌고 이 태산에 올라서 봉선의식을 행했습니다. 하늘의 제를 지내고 그 제를 통해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만천하에 고했습니다. 이 의식은 대단히 중요한 의식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시황제는 이 진이라는 나라를 통치하는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죠. 자, 영원할 것 같은 이 제국을 다스리는 몇 가지 중요한 정책이 있었습니다. 네, 첫째 군현제도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정전제를 얘기했고 종법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가장 중요한 지역에 살고 그 주변 땅을 나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한테 나누어줌으로 인해서 상당히 독자적인 방식을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를 다스리는 사람과 나와는 주공이라는 관계로 묶여있어요. 그래서 의무와 책임 관계가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주변사람들을 동원해서 그 나라를 무력으로 압박을 하죠. 그러나 앞에서 우리가 그 소위 말하는 그렇게 이루어진 봉건제도가 무너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점차 시간이 오래갈수록 그 종법제가 느슨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새로 구현한 제도가 바로 군현제도입니다. 전국을 군과 현이라는 행정제도로 나눕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직접 그곳에 관리를 보내요. 그러니까 그곳을 통치하는 사람은 황제 권한을 받은 현지의 군수나 현령이죠. 그 사람은 황제를 대신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그것을 세습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만약에 잘못을 했거나 수시로 그 관리는 바뀝니다. 그렇지만 황제의 명은 계속 살아있어요. 앞에서 같이 아들을 낳고 뭐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황제가 새로운 사람을 그곳에 계속 보냄으로 인해서 황제의 통치를 더욱더 굳건히 하는 것이죠. 진시황이 만들어 놓은 이 군현제도는 2천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은 없어졌지만 군은 아직 남아있죠. 일본에는 현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방자치제라는 것을 통해서 지방이 중앙의 권력에서 많이 독립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아직도 지방이 예를 들어서 세제라는 가 여러 방면에서 중앙의 깊은 종속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죠. 이 군현제도를 맨 처음으로 이룬 사람. 전국적으로 맨 처음으로 이룬 사람이 바로 시황제입니다. 물론 앞에 우리가 말씀드렸던 그 공손앙 그 상앙의 변법에서 이 군현제도가 처음으로 실행이 되었지만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바로 시황제가 처음입니다. 자, 또 하나 치도의 건설이다. 치도, 치도는 이 치자는 말 달릴 치자입니다. 말 마자에다가, 말 마자에다가 옆에 이런 것이 붙은 것이 이게 치자입니다. 이것은 말의 등에 보면 갈기가 있잖아요. 말이 막 뛰면 그 갈기가 펄럭펄럭 이죠. 그래서 이 치자는 말 달릴 치자입니다. 치도는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을 치도라고 합니다.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은 되도록 평평해야 되겠죠. 말이 산을 달리는 거 보다는 평평한 길을 달리는 것이 빠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수도인 함양, 이 함양은 지금의 서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입니다. 함양을 기점으로 동남으로 폭이 50미터인 도로를 만들었어요. 대단한 일이죠. 폭이 50미터면 지금 우리 왕복 한 8차선, 10차선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왜 이 도로를 만들었느냐? 진시황은 도로의 의미를 알았어요. 자, 지금 서로 다른 여섯 나라가 하나의 boundary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문화를 서로 교류를 해야 됩니다. 교류를 통해서 커다란 하나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돼요. 그럼 그 문화를 교류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길입니다, 길. 길을 뚫었어요. 길을 뚫었습니다. 우리나라 보십시오. 비록 작은 나라지만 고속도로가 없기 전에 고속도로가 있기 전에 서울과 부산의 거리. 88고속도로가 있기 전에 영남과 호남의 거리. KTX가 있기 전에 서울과 지방간의 차. 이런 것들을 극복한 것이 바로 도로입니다. 그래서 문화가 쉽게 동화되고 또 다른 새로운 커다란 문화가 형성이 되죠. 치도를 건설한 두 번째 목적은 혹시라도 지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해서. 병력을 빠른 속도로 이동시키기 위해서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또 세 번째 각국이 그 전에 있었던 여섯 나라가 북방에서 오는 오랑캐들을 막기 위해서 성을 쌓았어요. 이 시황제는 중원을 통일 한 이후에 그 성, 그 외곽에 있는 성들을 전부 연결했습니다. 그 성이 아주 길게 됐죠. 그래서 그 성을 장성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외부에 있었던 오랑캐들. 특히 흉노족을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여섯 나라의 문화를 통일하기 위해서 문자와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했습니다. 문자통일. 각 나라가 글자 쓰는 것이 조금씩 달랐어요. 그것을 하나로 통일했고 도량형을 통일했고 화폐를 통일했고 이 세 가지일이 엄청나게 힘든 일입니다. 시황제도 하지 못했던 것, 언어를 통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중국의 언어가 통일하는데 시황제 이후로 얼마를 기다렸습니까? 2천년을 기다린 이후에 1945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서야 비로소 중국의 언어가 통일되었습니다. 통일이 되었습니까? 예, 표준어가 있고 북경어를 표준어로 했으니까 했지만 아직도 지방에 가보면 지방 방언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자,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들 이것은 좋은 말로해라.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 이렇게 해서는 절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강압적인 수단. 신상필벌, 공평무사이라는 법가의 그 엄청난 pressure가 있어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이죠. 모두가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 유생들. 공자님을 따르는 유생들은 계속 이 시황제한테 덕을 베푸시오. 인의 정치를 펴시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조직적으로 반항을 하기도 했어요. 시황제가 보다 못해서 전국의 농업과 의학에 관한 책만을 빼고 모두 반대하는 책들은 전부 불살라버렸습니다. 분서죠. 책을 불살랐습니다. 그래도 떠드는 사람들, 유생들은 모아서 수백 명을 땅속에다 산채로 묻어버렸습니다. 시황제가 보기에는 이 흩어진 나라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자신의 통치방법이 정당하다고 보았던 겁니다. 권위를 세우기위해서 엄청난 크기의 궁궐을 세웠습니다. 그것을 아방국이라고 하죠. 훗날 이 아방국은 항우에 의해서 불에 타서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여산능, 자신의 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차례에 걸쳐서 전국을 순시를 했습니다. 만약에 반란 세력이 있다면 그 반란 세력은 돈이 필요할 것이다. 왜? 새로운 병사들을 모집하고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러면 그 반란세력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려면 전국의 돈을 가진 사람들을 그 돈이 다른 데로 흩어지지 못하게 해야 될 것이다. 그래서 전국의 부호들에게 자신들의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아들들을 수도인 함양으로 인질로 잡아놓았습니다. 전국을 꼼짝 못하게 해놓고 자신의 정책을 실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모두가 납작 엎드린 채 이 시황제의 새로운 통치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시황제의 통치가 이렇게 유생들의 반대와 또 여러 차례 암살 위험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약 15년 동안 시황제는 중원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됩니다. 자,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시황제가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잠시 한 숨을 돌린 다음에 시황제의 다음 발걸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